2016 마르쉐@혜화 ‘햇밀’
청주의 앉은뱅이밀 칼국수 가게에서는 아침마다 구수한 빵 냄새가 난다. 이곳 주인 나하나 씨는 올해 초부터 매일 새벽 직접 농사지은 앉은뱅이밀로 빵을 굽는다. 요즘은 입소문 덕에 곧잘 나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스란히 남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그녀는 이 일을 멈추지 않았다. 간혹 굽다가 망친 빵들은 아버지 나병진 씨와 그의 자녀들이 함께 일구는 1,000평 밀밭의 거름으로 돌려보낸다.
마르쉐에 마을에빵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그녀의 빵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잘 발효되어 큼직한 구멍을 품은 캄파뉴는 통밀의 구수함과 함께 앉은뱅이밀의 찰기가 살아 있는 최고의 맛이었다. 청주 앉은뱅이밀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반 년간 같은 밀로만 빵을 구워온 나하나씨 자신일 것이다. 농가의 밀 빵에는 밀과 빵을 굽는 사람의 시간과 관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땅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가는 다양성이 담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차이가 주는 소소한 즐거움에 행복감을 느낀다.
앉은뱅이밀 열풍이 분다. 대형 푸드 체인이 앉은뱅이밀로 계절메뉴를 런칭하고 어떤 백화점에서는 고객 사은품으로 앉은뱅이밀을 나누어주기도 한다. 반갑기도 하지만 우려의 마음도 크다. 앉은 뱅이밀은 이 땅에서 기원전부터 길러져 오던 밀이다. 금곡 정미소 백관실 같은 남녘의 농부들이 뻘건밀, 적밀이라 부르며 조금씩 기르던 이 밀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의 밀의 뿌리라는 사실은 토종연구가 안왕식 박사에 의해 2013년에야 확인되었다.
앉은뱅이밀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거쳐 미국인 노만 블로그의 손에 들어가 소노라 64호로 개량되었다. 노먼박사는 앉은뱅이밀의 유전자를 사용하여 새로운 품종을 개발했고 이 개량 밀로 인류를 기근에서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키가 작아 바람을 잘 이기고 병충해에 강한 앉은뱅이밀의 개량종 출현은 당시 녹색혁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고, 이 밀은 오늘날 북아메리카 로키 산맥 동쪽의 광대한 평야지인 ‘그레이트플레인스’는 물론 세계 밀밭의 주인공이 되었다.
최근 앉은뱅이밀은 슬로푸드 국제본부가 진행하는 전통 음식과 문화 보전 프로젝트 ‘맛의 방주’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재평가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19세기부터 재배되던 터키레드라는 키가 180cm가 넘는 밀이 최근 맛의 방주에 등재되었다. 미국 대평원 지대의 삶을 담은 ‘초원의 빛’이라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어야 마땅한 이 큰 키의 밀은 20세기 중반 앉은뱅이 밀을 잇는 키 작은 품종의 밀에 밀려 지금은 미국에서도 소수의 농가만이 이 그 씨앗을 이어가고 있다. 『텃밭의 기적』이라는 책에서 저자 데이비드 뷰캐넌은 “유산작물 보존의 목표는 농장과 시장에서 생산자와 요리사가 역사적인 품종에 관심을 갖고 이러한 먹거리가 다시 음식 문화 속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 이라며 상업적 생산시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앉은뱅이밀의 열풍은 생물유전자 보존이 브랜드 개발로 이어진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부드럽고 적당한 찰기를 지닌 앉은뱅이밀은 소화흡수도 빠른 데다 개성 있는 풍미를 자랑한다. 하지만 기계농사가 일반화된 요즘, 구례의 홍순영 농부처럼 유기농사의 기술을 잘 갖추지 않으면 앉은뱅이밀은 쉽지 않은 농사다. 잘 자라도 키가 70cm밖에 되지 않는 앉은뱅이밀은 어설프게 자라면 콤바인을 사용할 수 없고 밀의 가치도 많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낫질해서 베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밀의 키를 자라게 하려면 비료사용이 불가피하다. 유기순환농법이라는 잣대만으로 들이대면 앉은뱅이 밀 농사가 썩 유리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땅에는 다양한 밀이 자란다. 준강력분으로 가장 무난하게 쓰이는 금강밀, 강력분으로 개량된 조경밀, 그리고 과자용으로 보급되는 박력분 고소밀이 있다. 개량된 품종이라고는 하나 금강밀은 우리 땅에서 40년 이상 자라온 밀이다. 개량된 품종의 여러 밀은 각 특징에 따라 쓰임과 맛이 다를 뿐 무엇이 더 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에 극소수 농가들이 재배하는 흑밀에 볏과 식물인 호밀류까지 더해지면 그 다양성은 더욱 커진다. 빵을 굽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밀의 종류만이 아니다. 농가마다 땅의 성격과 농부의 품성, 농법, 주변 환경에 의해 제각각의 풍미를 가진 밀이 길러지고 있다. 이 밀들을 우리밀이라는 이름만으로 부르거나 토종이냐 아니냐만 가지고 서열화시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우리밀 운동이 이 땅에 뿌리내린지 25년이 지났다. 그간의 노력으로 우리밀 자급률 1.6%라도 지켜내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럽지만, 비슷한 처지의 일본의 밀 자급률이 10%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뭔가 다른 생각과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유명한 와인이나 위스키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과 지역(땅)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게 발신한다. 그 관계가 만들어가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땅의 곳곳에서 자라는 밀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지역, 다른 땅의 역사와 정보를 담고 있는 농가의 밀에는 정성스럽게 씨를 받아서 이어가는 농부들과 그 농부들이 삶이 담겨 있다. 농가가 이어가는 밀이라는 것도 결국 어린 시절부터 먹어온 밀 맛을 잊지 못한 농부들에 의해 이어져 왔으니, 빵을 굽는 이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6월 초 햇밀 수확 전에 밀밭을 보겠다는 욕심으로 달려간 구례, 그리고 하동. 이곳에 농가 밀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농가 사람들을 새롭게 엮어가는 월인정원 이언화의 작업장 ‘달의 부엌’이 있다. 그녀와 함께 농가 밀 식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청주 앉은뱅이 밀 농부를 비롯해 괴산 밀농가의 목수 농부 부부, 함양 산아래 제분소 대표 등 다양한 이들이 농가 밀빵을 함께 구웠다. 이날 홍순영 농부의 호밀을 주제로 농가 밀 식탁을 차려낸 대전성공회 오동 균 신부 부부처럼, 이 식탁을 함께 하기 위해 각 처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빵을 굽는 일에서 시작해 이제는 직접 밀 농사에 나선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제각각이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저마다의 고유성을 가진 농가 밀의 다양함을 귀하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밀에 어울리는 쓰임을 찾고 그 고유한 특성과 풍미를 살린 빵을 굽는 일을 즐겁게 여긴다는 것. 이들이 직접 굽는 향기 좋은 빵과 여기에 곁들이는 제철 채소, 열매들, 작은 접시 하나와 냅킨 한 장으로 간소하게 차려지는 소박하고 간결한 식탁의 아름다움은 세상 사람들을 이 남녘 끝 하동 골짜기로 불러들인다.
농가 밀 식탁은 부엌에서 끝나지 않고 들판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자신이 구운 빵과 과자를 챙겨 농가를 방문한다. 교잡을 막기 위해 구례의 산속에 자리 잡은 홍순영 농부의 호밀밭에서 호밀빵의 거친 향을 호흡하고, 황인중 농부의 흑밀밭의 풍광을 마음에 담으며, 하동 강영선 농부의 앉은 뱅이밀밭의 안부를 묻는다. 농가 밀로 빵을 굽는 다는 것은 단순히 빵만을 굽는다는 건 아니다. 밀을 만들어가는 마을의 풍경을 가슴에 담고 밀을 통해 지역과 농부의 삶이 만나는 것이다. 또한 지역의 작은 제분소를 지키는 일이자 밀을 나누는 망을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다.
만나는 이들마다 한결같이 말한다. 상황이 희망적이지 않다고. 농가들은 당신들이 짓는 이 농사를 이어갈 사람을 찾지 못하고, 농가밀빵을 굽는 이들 역시 감히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농가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가 있어 깊게 안도한다. 한 덩이의 농가 밀 맛에 취한 이들의 충만한 미소가 이 땅의 밀을 지켜갈 것이라는 희망은 나만의 낙관일까?
밀 구입처
우리밀 http://posship.firstmall.kr/goods/view?no=211
금곡정미소 http://www.goldvalleymill.com/
지리산 우리밀(산아래제분소) http://www.jirisanare.com/
청주면가앉은뱅이밀 http://hanameal.com/
마르쉐@혜화 <햇밀> 전체출점팀 소개
http://blog.naver.com/marcheat/220749759652